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㉙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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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을 지키는 것이 국어와 역사야”
2015년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시끌했다. 더구나 한 해가 저무는 말미 12월 28일에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법적 책임을 명시하지 않은 채 소녀상 이전을 약속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발표됐다.
연말 연초부터 국민들은 찬바람을 맞았다. 피해자들은 가슴을 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역사라는 것, 국가라는 것, 그리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삶이 짓밟힌 국민은…. 이런 것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파주 탄현면 헤이리에 이이화 선생(37년생)을 찾아 해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위안부 한일 외교장관 회담으로는 역사의 죄인이 된거야”
“말이 안되지. 법적 책임을 져야해. 공식으로 사과 해야지. 피해자의 의견 없는 회담 성사가 무슨 말이 돼냐구?” “국정교과서는 민주주의의 패착이고, 일본군 위안부 외교장관 회담으로는 역사의 죄인이 된거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정부의 태도와 달리 대만은 교섭에 들어가기 앞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 등으로부터 관련 의견을 청취키로 했다는 보도는 가슴을 쓰리게 한다. 근래 밴드에는 ‘자신이 강간 당한 것을 아들이 가해자에게 쫓아가 합의해 피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비유하는 슬픈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슬프다 못해 자책까지 드는 사태이다. 그래서 ‘역사’가 더 소중한 지도 모르겠다.
“위를 덜어 아래를 이익되게 해야”
역사를 가장 쉽게 풀어내는 재야학자
우리나라 학생중에 이이화 선생의 책을 안 읽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물로 읽는 한국사』, 『허균의 생각』,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22권), 『이이화의 주제로 보는 한국사』, 『전봉준 혁명의 기록』등 100여권의 저서가 있지만,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저서가 많다.
이야기체 역사서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역사서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글을 쓰고, 아직도 전국으로 강연을 다니신다.
▲이이화 선생의 역작 '한국사 이야기' 22권
이이화 선생은 1936년 대구 비산동에서 주역의 대가인 야산(也山) 이달(李達)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방되기 3년 전에 익산으로 이사와 살다가 1945년 아버지를 따라 대둔산에 들어가 한문 공부를 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학교를 다니려고 가출하여 부산, 여수, 광주 등을 더돌다 여관 종업원 노릇을 하며 광주고를 졸업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문학청년’의 꿈을 키웠지만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중퇴하고, 아이스케키, 빈대약 장수, 술집 웨이터, 가정 교사 등 20여가지 직업을 거쳤다. 이십대 후반 무렵 본격적으로 역사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고, 동아일보사 출판부와 색인실 임시직을 거쳐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실, 서울대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에서 고전과 역사를 연구했다.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설립 때 참여한 뒤 연구소장이자 [역사비평] 편집인으로서 동학농민전쟁 등 민중, 생활사 연구와 역사답사기행 등을 주도하며 역사 대중화에 나섰다. 이렇듯 독학으로 ‘역사학자’의 길을 개척하면서 ‘민중사 문화사 생활사’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일궈냈다. 특히 1995년부터 10년동안 칩거하며 써낸 한국통사인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22권)는 필생의 역작으로 꼽힌다.
역사학자로서 저술뿐만 아니라, ‘역사 바로잡기운동’, ‘과거사 청산’ 등 왜곡된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바로잡는 역사 운동가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이이화 자서전 『역사를 쓰다』의 저자 소개글 인용)
▲이이화 선생의 자서전 표지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는 나라는 북한과 이슬람 국가 뿐
“국어와 국사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요. 말과 혼을 지키는 것이 국어와 역사예요.”
선생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분노했다. “해방후에 이승만은 교과서를 검인정으로 했어요. 우리가 검인정으로 배운 세대지. 그런데, 박정희가 유신을 하면서 국정으로 한 거야. 여기에 박정희 유신 대목을 보라고. 유신을 미화해놓았다고.”
역사 교과서가 정식으로 검인정으로 바뀐 것은 4년 밖에 안되었다. 만일 문제가 있다면 문제만 고치면 될 일이지 국정화를 하는 이유는 ‘유신 미화’뿐이라고 선생은 단호히 말했다. 세계에서 민주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 국가권도 모두 검인정이다. 베트남도 검인정으로 바꿨고, 소련과 중국도 검인정으로 바꿨다.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는 나라는 북한과 이슬람 국가뿐이다. 세계 모든 나라가 국정에서 검인정으로, 검인정에서 자유채택제로 가고 있는데, 왜 거꾸로 가고 있는가 한탄했다.
국정화를 하는 이유는 ‘유신 합리화’뿐
현재 검인정교과서 8종에 대해 국사학계는 ‘중도우파 3개, 중도 4개, 극우 1개(교학사)’로 평가한다고 했다. 현재의 검인정 제도하에서도 교육부 지침을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친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정화를 하려는 이유는?
“국정화를 위한 논리로 제시하는 것의 90%이상이 거짓말이야.” 이이화선생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목표는 ‘박정희의 유신을 합리화 하는 것’과 ‘근현대사 축소’에 있다는 것이다.
“종교 학문 언론 출판 사상의 자유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어. 교과서 국정화는 어떻게 보면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파주 시민들과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항의하고 있다.
“전봉준이 추구했던 노선이 지금 민주화로 이어지는 것이야.”
선생께 많은 저서중 한 권만 신문 독자들에게 권한다면 무엇이냐고 여쭈었다. 서슴없이 [허균의 생각]과 [전봉준 혁명의 기록]을 권했다.
“허균은 인권운동가여, 당파, 귀천, 남녀라는 문제를 중세 사회에서 깨려고 했지.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근대 사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1801년 관노비를 해방시켰어. 일부지만. 이건 유럽의 노예해방을 본 딴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 조치였지. 이 시대에 허균의 인권사상이 있었어”
“프랑스혁명이 유럽사를 바꿔버렸어. 자유 평등 박애. 부르조아 계급들의 권익 보장요구. 전봉준이 추구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야. 지주 소작 없애자, 양반 노비 가리지 말자, 외세에 굴종하지 말자. 그것이 전봉준이 추구하던 것이야. 프랑스혁명처럼 영향이 크지 않았지. 프랑스혁명도 몇 번의 실패를 거쳤지. 이것이 지속되어야 했는데, 일제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지. 프랑스는 외세의 침탈이 없었지. 그런데 우리는 일본 식민지를 거쳤잖아. 전봉준이 추구했던 노선이 지금 민주화로 이어지는 것이야.”
허균과 전봉준을 말하는 선생의 목소리에는 두 사상가를 되살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깃들어 떨리기조차 했다.
“통일이 되어야 해.”
이이화 선생은 앞으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통일이라고 말했다. “이젠 절대로 남쪽에서는 군사쿠테타는 못 일어납니다. 문제는 북한이야. 첫째, 통일이 되어 누가 이익을 보나? 이거예요. 우리 다같이 이익을 봐요. 분단을 만든 사람들, 6자회담에서 남 북을 뺀, 미,일,소,중 모두 통일의 방해자이지. 그들이 북핵문제를 푼다고 하지만, 우리 스스로 해야돼.”
지금 우리나라는 분단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안보 경비를 쓰고 있다. 북에서는 핵과 무기를 만들면서 체제 유지 경쟁을 하고 있고, 남쪽에서는 기술이전도 안되는 비싼 무기를 사오면서 국민 복지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며 분단 문제만 해결해도 국민 복지의 양과 질이 절대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운 놈 골목에 몰아넣고 두둘겨 패지 말고, 싸우지 말자고 유도해야하는데.”
“두 번째. 거대한 민족통일보다도 현실적인 얘기로 들어가도 통일해야 해. 북한은 세계 5대 지하자원 소유국에 들어가. 석유도 엄청나. 정주영이 알았잖아. 그런데 개발이 안된 거지. 문제는 중국에서 70~80%를 다 계약했다는 거지. 중국에서 다 했어. 핵은 중국에서 못하게 하지만, 갈등은 없어. 이걸 남쪽 기술이 들어가면 좋잖아. 기술 자원 투자해서 5:5로 나눠먹자. 요샛말로 윈윈이잖아. 이 얼마나 좋아.” 이이화 선생은 현실적인 이유로도 통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자원을 남한의 기술과 자본으로 개발한다면 남북 모두 이득이 될 것이고, 우리나라의 제2의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 전망했다.
“나도 금방 통일하는 것은 반대하지. 북한 주민들은 세뇌가 되어서, 금방 융화가 안된다니까. 북진통일 강제통일 한다고 쳐봐.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세뇌된 주사파들이 있어. 목숨걸고 싸울 사람 3,000명만 있다고 쳐도, 이들이 폭탄 들고 서울 와서 한 개씩 터뜨려. 그러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이고 뭐고 투자자고 다 날라가. 이런 통일을 해야되는가?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야. 미운 놈 골목에 몰아넣고 두둘겨 패지 말고, 싸우지 말자고 유도해야하는데....”
아주 쉬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니, 과정없는 통일, 융화없는 통일의 위험이 한 눈에 읽혀졌다. 파주가 도시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것도 남북간 대화가 활발히 진행되던 김대중 정부때부터였다. 파주야말로 앞장서서 통일운동을 해야할 곳이다.
위를 덜고 아래를 이익되게 한다
선생께 좌우명을 여쭈었다. 3개의 사자성어를 노트에 적어주신다.
정조의 좌우명이었던 손상익하(損上益下 위를 덜고 아래를 이익되게 한다), 최시형의 좌우명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라), 전봉준의 광제창생(廣濟蒼生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널리 구제한다). 뜻만 알아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말씀들이다. 손상익하! 사인여천! 광제창생! 이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
모든 것을 떠나서 ‘내 것을 덜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손상익하부터 해야할 터이다.
글 · 사진 임현주 기자
#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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